2018년9월 셋째 주-버닝(BURNING, 2018) 영화

2018 9 17 버닝(BURNING, 2018)


 텔레비전을 틀고 예능을 보는데 갑자기 우울해 질 때가 있다. 텔레비전 속 연예인들은 항상 다른 장소, 다른 먹거리, 매번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매번 긍정적인 웃음과 눈물로 가득 차 보인다. 내 상황과 항상 대비되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광대놀음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우울해진다. 이러한 우울감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을 하고 있어도, 하지 않고 있어도 힘든 세상에서 텔레비전 속의 생활은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우울한 내 그림자를 짙게 만드는 것 같다. 영화 버닝(BURNING, 2018)’은 요즘 청년들의 우울감을 몽환적으로 그리고 차갑게 묘사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물류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종수(유아인)는 우연히 잊고 있던 고향친구 혜미(전종서)와 만난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와 술자리를 갖게 된 종수는 서슴없이 다가오는 혜미에게 끌림을 느낀다. 혜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여행을 다녀올 동안 자신의 고양이를 돌봐줄 수 있는지 부탁하고, 종수는 흔쾌히 허락한다.

 시간은 흘러 혜미는 여행에서 돌아온다. 공항으로 마중나간 종수는 혜미와 벤(스티븐 연)을 만난다. 벤은 혜미가 나이로비 공항에서 체류되었을 때에 친해진 사람이라고 한다. 이후 종수는 혜미와 벤과의 만남이 늘어나고, 모든 것이 그와는 정반대인 벤에게 수상함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날 혜미는 갑자기 사라진다.

 

 나는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이 대중과 평론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제라고 한다면, 칸 영화제는 평론가 위주의 영화제라고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BURNING, 2018)’은 칸 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영화답게, 꽤나 복잡하고, 메타포로 꽉 차있으면서 버릴 군더더기가 별로 없는 영화이다. 하지만 복잡하기에 발견할 수 없는 지점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매력을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 인물은 몇 등장하지 않는다. 종수 혜미 그리고 벤이다.

 종수의 역활은 범인(凡人)이다. 종수는 끝까지 헤매이고 망설인다. 종수에게 세상은 수수께끼같은 것이어서, 혜미가 말하는 것도, 벤이 말하는 삶도 이해 할 수 없다. 이해 할 수 없기에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혜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에 확신을 내릴 수 없어 고백하지 못한다. 벤이 혜미를 사라지게 만든 것 같은데도 그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당장의 감정에 의지하며 행동하고 오늘도 내일도 같은 길만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벤이 태웠다고 하는 비닐하우스를 찾아 같은 자리를 매일같이 달리는 모습은 종수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헝거(hunger)와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혜미는 헝거란 배가고픈 사람을 의미하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혜미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며 마치 자신이 그것을 갈구하는 양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취해 있을 뿐이다. 현실을 잊기 위해 환상 속에 몸을 내던지고 회피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영화 내내 춤을 추는데, 그 춤의 의미에 대해 그녀는 설명하지만 누구도 공감하지 못한다. 그녀의 의미 있는 춤은 한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추한 몸짓인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진의가 어떻든 그녀를 보고 비웃는다. 이러한 상황은 꽤나 상징적으로 비춰진다. 이 장면을 계급사관과 연관지어 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그 모임에서 경제적인 약자이고 비웃는 그들은 경제적인 강자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이 종수의 의해서 좀 더 높은 차원의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춤을 추고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리고 종수는 이것을 불쾌하게 바라보고 있다. 벤은 하품을 한다. 종수는 이곳에서 가장 현실과 가까운 사람이다. 그의 안은 이런 저런 고민들로 꽉 들어차있어서 환상 같은 것들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선을 하고 있다. 노골적인 비웃음과 벤의 하품에 불쾌감을 느끼며, 남의 진정어린 감성을 부끄럽게 치부한다. 이러한 종수의 시선으로 인해, 혜미가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장면이 가진 것 없는 자들의 광대 짓을 비웃는 귀족들의 모습이 아닌, 서로를 이해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불쾌한 모임장소를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반전시키는 인물은 벤이다. 종수와 혜미 사이에 끼어든 벤은 그들의 세상과는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멋진 차, , 생활까지도 종수와 혜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비는 종수와 혜미를 옭아매지만, 다름을 받아들이는 종수에 비해 혜미는 그것들에 동화되려고 한다. 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벤은 미끼를 던졌고 혜미는 물어버린 것이다.

벤은 계속 웃고 있다. 그는 영화 내내 한 번도 화난 모습이거나 다른 감정들을 내비치지 않는다. 종수와 혜미가 여러 가지 감정들을 드러내는 동안 벤은 계속 웃음으로 일관한다. 우리는 벤의 의도도, 진실도 포착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봐야한다. 이러한 불편함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일어나고 결말이 날 때에도 어떠한 정보를 받지 못한 채 끝난다. 분명히 의도된 불편함이다. 그럼 이 불편함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나는 이 불편함의 정체를 여러 가지의 복합적 이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종수의 무기력함과 혜미를 향한 비웃음과 벤의 하품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판토마임이나 삶의 의미같은 불확실한 것들이나 카드 값 같은 확실한 것들에서 비롯되어 있을 수도 있다. 곰곰이 생각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현실과 닮았다는 점에서 나온 불쾌감인 것 같다. 영화는 술처럼 현실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며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나는 이 불쾌감의 정체가 이러한 현실성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 관해 많은 해석들과 평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본 후에 평론보다 감성이 앞선다. 왜냐하면 나도 종수와 다를 바 없는 청년이니 말이다. 종수도 나도 확실한 것은 눈앞의 감정들 밖에 없고 세상은 온통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이창동 감독이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얼마나 불쾌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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